인자요산 글/솜씨 방

백년 웬수

didduddo 2010. 3. 26. 18:53

 

몇년째 희귀병으로 병상신세를 면치 못하는 부인을 간병하는 이에게 물었습니다.
"그렇게라도 살아서 곁에 계시는 것이 낫나요?"
"자식 필요 없어. 아무 필요없어.마누라가 제일이여.
죽어버리면 나혼자 멍하니 뭔 재미로 살것어."
지천명을 훌쩍 넘기고 이순을 코 앞에 둔 그의 삶에 대한 답입니다.
저마다 삶에 대한 답은 다르겠지만 단 하나의 공통점은
부부가 백년해로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백년웬수라 투정아닌 아양도 부리지만 곁에 있으니 하는 말이겠지요.

자식들 시집 장가 보내면 "칵 죽어 버려야지."를 입버릇처럼 뇌이던 분이 계셨습니다.
자식들 시집장가 보내면 숙제를 마친 듯 홀가분할 것 같았던 모양입니다.
지옥같은 세월을 모진 맘 먹고 견뎌내더니, 자식들 시집 장가 보내고
웬수같은 지아비마저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놓고는 정신을 놓아버렸습니다.
미워할, 사랑할 상대가 없어진 까닭일까요.
홀가분하게 새처럼 바람처럼 살고자했던 염원을 풀어보지도 못하고 병상에 누워계십니다.
속썩이는 남편이라도 곁에 있다면 맨정신으로 살아가실까요?

부부란 그런 것 같습니다.
너무 버거워 인연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을 땐 자식이 그 끈을 잡아주고 
오히려 버거워져버린 자식들을 품에서 떠나보내고 나면 그제서야 놓고 싶었던

그 끈을 가슴에 꼭 메어 놓고 싶은 것 말입니다.

병상의 아내에게 좋은 것 먹이고 싶다며 자전거로 두어시간 걸리는 거리를 다녀오는
그의 자전거 뒷자리엔 플라스틱통 가득 토종닭이 낳은 알이 담겨 있습니다.
"요것 구하기 힘들어. 포도시 구했어. 마눌 멕일라고."
맛있게 먹는 마눌 생각에 그의 얼굴은 벌써 웃음이 가득합니다.
노끈으로 묶은 끈이 헐거워지지 않았는지 단단히 단속하고는
그제서야 이마의 땀을 손으로 쓱 문지릅니다.
그리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전거 페달을 밟습니다. 마눌을 향하여.

가게일에 메여 꽃이 피는지 지는지도 모르고 사는 재미없는 세상, 무슨 재미로 사나 싶다가도
비록 잘난 것 없지만 마눌 없는 세상 멍하니 맥없이 살아 갈 누군가를 위해
구십구세까지 팔팔하게 살다 두서날 아프다 잘 죽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사는 것 못지 않게 힘든 것이 죽는 것 아닙니까?

이땅의 모든 어머니들이 한번쯤 가슴에 품었을 백년웬수에 대한 미움,
사랑이 없으면 미움도 없다지 않습니까.
나도 누군가에게 웬수덩이가 되어본 적이 없었던가 생각한바,
가슴에 한치 부끄러움없이 그런바 없노라고 답할 자 누구라 있겠습니까.
살아 있는 동안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팔팔하게 잘 살아야겠습니다.
정신 단단히 차리고 말입니다.           -백년 웬수, 인자요산- 08,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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