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9일 월요일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4.19 혁명이 일어난지 19일로 50주년을 맞았다.
1960년 4월 학생들이 중심세력이 되어 일으킨 민주주의 혁명. 4월혁명, 4·19의거라고도 한다.
4·19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은 그해 3월 15일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의
자유당 정권의 불법·부정 선거였으나, 근본적인 원인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탄압이었다.
1960년을 분수령으로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권위주의적인 고령의 이승만 정권이 종식되기를 갈구했다.
그러나 1950년대말 국가보안법의 시행과 이승만의 재집권 기도, 진보당 당수 조봉암의 처형,
그리고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욱의 사망이라는 일련의 사건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나라 국민들의 열망과 기대를 잠식시켰다.
건국 후 12년을 집권한 이승만 정권의 제1공화국에서의 정치적 쟁점은 근본적으로 정권적 차원의 것이었다.
즉 부정선거를 통한 장기 집권과 독재 권력에 반대하여 민주 절차에 의한 정권 교체를 요구하는
운동이 정치 투쟁의 주류를 이루었던 것이다. 따라서 4·19혁명이라는 대중적 봉기로
극적인 표출을 본 제1공화국의 갈등은 체제나 이념 차원의 대결이라기보다는
이승만 정권의 지지자들과 그 반대자들 사이의 반목과 투쟁이라는 정권 차원의 정치 현상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지지자와 반대자 사이의 분열에 관해 지지 그룹은 자유당 내 이승만의 직속 측근들,
경찰과 관료, 군부(특히 고위층), 그리고 일부 기업인들로 구성되었고, 반면에 그들에 대한 적대 그룹에는
민주당의 야당 정치인, 대학·언론 연계 속의 지식인들, 그리고 학생들이 포함되었다.
따라서 4월 '혁명'은 지지 그룹의 통치에 대한 적대 그룹의 성공적 도전과 전복으로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1960년 당시 한국의 상황은 이승만 정권의 권력구조와 정치의식계층,
특히 학생들의 가치관 사이에 크고 명백한 균열을 보이고 있었다.
4·19혁명은 이승만과 그의 지지세력에 대항하는 반정부세력에 의한 혁명적 시도였다.
그러나 시위학생들과 시위군중들은 그들 스스로의 조직화된 혁명의 지도력을 가지지 못했다.
조직화된 혁명의 지도력이 없는 상태에서 학생은 학원으로 돌아가고,
혁명의 결과도 당시로서는 별다른 대안 없이 유일한 정치세력인 민주당이 가져갔다.
역설적으로 이와 같은 명백한 지도력의 부재가 이승만의 조속한 사임을 가져오게 했다.
그러나 이는 이승만 정권의 붕괴 후에 '혁명'을 완성시키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장기집권 유지를 위해 대리투표, 무더기투표 등
대규모 부정선거를 저지르자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 마산시당이 선거포기와 함께
규탄하는 거리 방송을 시작하면서 시위는 시작됐다.
학생과 시민 등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시위가 확산되자 경찰은 실탄을 발포했고,
학생과 시민 등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시위가 확산되자 경찰은 실탄을 발포했고,
최소 8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총상을 입는 유혈사태에 이르렀다.
4월 11일. 시위 당시 행방불명됐던 마산상고 1학년 생인 김주열(당시 17세) 열사가 27일 만에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주검으로 마산중앙부두에서 발견되면서 마산 시민의 분노는 극에 달았다.
이날 2차 시위는 전국으로 번져 나갔고, 4월 19일 혁명으로까지 이어져 결국 25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하면서 자유당 정권은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