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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주화운동

didduddo 2010. 5. 18. 10:14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벌어진 광주 학생과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이다.

[원인]


박정희 유신 독재의 비민주성과 폭력적 통치로 부산과 마산에서 부마항쟁이 일어나는 등 국민적 저항이 일어났다.

이러한 정권 위기 상황에서 박정희 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12∙12 사태를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고 군사 독재를 연장하려 하였다.

신군부 세력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발표하고, 민주 인사들을 체포투옥하여 비판과 반대 세력을 없애려고 하였다. 

광주의 학생과 시민들은 계엄령이 선포되어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하자 거리로 나서 신군부에 맞서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방 등을 요구하였다.

[전개 과정]


5월 18일 오전 9시 전남대 정문 앞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시위는 공수부대의 잔인한 진압에 분개한 시민들이 참여하면서 전 광주 시민의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공수부대의 발포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자 시민들도 파출소 등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하기 시작하였다.

5월 21일 오후, 온갖 만행을 자행했던 공수부대가 금남로에 운집한 시민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한 후 마침내 광주에서 철수하였다.

시민들이 광주를 장악했으나 계엄군의 포위 속에 고립되었다. 광주시민들은 시위대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고,

시위대는 치안 등 자치 활동을 수행하며 민주주의 공동체를 이루었고, 23일부터 날마다 범국민궐기대회를 열었다.

그러나 27일 새벽 외곽도로를 봉쇄하고 탱크 등으로 무장한 계엄군이 광주로 진입하자 카빈 소총으로 무장한 시민군이 잠시 저항하였으나,

중무장한 계엄군에 의해 차례차례 사살되고 광주시민들의 처절하고 영웅적인 투쟁은 수많은 희생을 낸 채 끝났다.

지금까지 정부의 공식 발표에 따른 사망자는 192명이나, 정확한 사망자 숫자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경과]

수많은 광주 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은 전국민을 공포 속에 떨게 하고, 1980년 8월 27일 통일주체 국민회의에 의해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 뒤 10월 22일 대통령 간선제를 주 내용으로 하는 헌법 개정안을 국민 투표로 통과시키고, 1981년 2월 25일 이 헌법에 의한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시 언론은 검열하에서 광주 시민들을 불순분자에 의해 사주 받은 폭도로 몰았고, 계엄군의 서슬 퍼런 총칼에 주눅이 든 국민들은 진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학생들의 시위와 1982년 3월 부산미국문화원 사건, 1985년 5월 서울미국문화원 농성사건 등을 통해 신군부의 책임과 이를 방조한 미국의 책임을 밝히려는

국민적 노력은 계속되었다. '광주 사태', '광주 항쟁' 등으로 불리던 명칭도 1988년 제6공화국 출범 직후 국회에서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정식 규정되었고,

1988년 11월 사건 규명을 위한 국회 청문회가 개최되었다. 광주 학살의 주역들은 김영삼 정부 당시 법적인 심판을 받았다.

[의의]

집권 세력에 대항하여 최초로 무장 항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시민군이 광주를 장악한 시기에 이루었던 민주주의 공동체의 소중한 경험을 남겼다.

1980년대 이후 급격하게 고양되는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실질적인 출발점이 되었고, 1987년의 6월 항쟁으로 계승되었다.(펌글) 10,05,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 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단결! 05,18

 

 

임을위한 행진곡/ 박진광

 

임을 위한 행진곡광주 민주화 운동을 기린 노래로서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1980년 12월)에서 가사를 따와 광주지역 문화운동가인 김종률씨가 작곡을 하였다. 이 노래는 광주 민주화 운동 때 시민군 대변인으로 도청에서 전사한 윤상원과 1979년 겨울 노동현장에서 일하다 숨진 박기순의 영혼 결혼식을 내용으로 하는 노래굿 '넋풀이'에서 영혼 결혼을 하는 두 남녀의 영혼이 부르는 노래로 발표되었다. 그 뒤, 1982년에 제작된 음반<넋풀이-빛의 결혼식>에 수록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민주화운동은 물론 각종 시민사회단체, 노동단체, 학생운동단체의 집회를 시작하는 때에 '민중의례'의 일부로서 널리 불렸다. 또한 중국어 등 외국어로도 번역되어 불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대한민국의 대중 집회에서도 흔히 불리는 노래이다